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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탐방]벨기에 더블록 벨벳 극장 – 붉은 커튼 뒤의 정적 산업도시의 심장에 자리했던 문화공간벨기에 남부 왈롱(Wallonia) 지방의 오래된 산업도시, 리에주(Liège) 인근. 무채색의 철도와 공장이 늘어선 구역 한복판에 숨겨진 낯선 건축물이 하나 있다. 바로 ‘더블록 벨벳 극장(De Bloc Velvet Theatre)’, 한때 광산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문화적 쉼터였던 이 극장은 지금은 폐허 속 정적의 대명사가 되었다.이 극장은 1930년대 초반, 광산 산업이 정점을 찍던 시기에 세워졌으며, 예술 영화 상영, 연극 공연, 음악회가 활발히 열리던 시민극장이었다. 좌석은 600석 규모였고, 붉은 벨벳 커튼과 황동 난간, 대리석 계단은 당시 노동자 계층에게는 드물었던 호사스러운 문화 경험을 선사했다.그러나 1970년대 후반 산업 구조조정과 탄광 폐쇄의 물결 속에.. 2025. 7. 7.
[해외탐방]폴란드 크르지나 정신병원 – 나치 유산의 음침한 자취 숲속에 가려진 병원의 과거폴란드 서부 루부쉬(Lubusz) 주의 깊은 숲속에 위치한 **크르지나 정신병원(Szpital Psychiatryczny w Krzyżanowie)**은 현재 지도에서도 쉽게 찾기 어려운 장소다. 19세기 말 독일령 시절에 지어진 이 병원은 원래 ‘요양을 위한 정원형 정신의료시설’로 설계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점령 하에서 어두운 역사의 중심지로 바뀌게 된다.이 병원은 당시 ‘T4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나치의 장애인 학살 계획에 따라 수천 명의 정신질환자들이 강제로 수용되고, 실험과 방치, 조직적인 살해의 장소가 되었다. 이는 단순한 전쟁 피해가 아닌 체계적인 국가폭력의 일환이었다. 특히 정신병원 내부에서 이뤄진 무기력한 환자에 대한 의학 실험, 절.. 2025. 7. 6.
[해외탐방]루마니아 파라노마 정신병원 – 고딕의 저편에 남겨진 기록 고딕 건축과 폐허가 된 치료 공간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지방, 브라쇼브에서 멀지 않은 산기슭의 어두운 숲 속. **파라노마 정신병원(Paranoma Psychiatric Hospital)**이라는 이름은 공식 지도에서도 찾기 어렵지만, 지역 사람들 사이에선 오랫동안 ‘버려진 고딕 병원’으로 불려왔다.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이 병원은 초창기에는 귀족 출신 정신질환자들을 위한 요양 시설로, 고풍스러운 고딕 양식의 건축과 정돈된 정원 구조를 자랑했다.세로로 길게 늘어선 주 병동, 삼각 지붕 위에 세워진 시계탑,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등은 당시 유럽 정신의학이 ‘치유’와 ‘격리’를 병행하던 시기의 건축 철학을 잘 반영한다. 병원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군인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치료소로도 사용되었으며, 냉전기.. 2025. 7. 4.
[해외탐방]프랑스 오라두르 쉬르 글란 – 전쟁의 폐허가 된 마을 침묵 위에 남겨진 마을, 오라두르 쉬르 글란프랑스 중서부 리무쟁(Limousin) 지방의 한적한 들판에 자리한 작은 마을, 오라두르 쉬르 글란(Oradour-sur-Glane). 이곳은 단순한 폐허가 아니다. 오늘날까지도 전쟁의 상처를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는, ‘기억을 위한 장소’다.1944년 6월 10일,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 나치 친위대(SS)는 이 마을에 진입해 민간인 642명을 학살했다. 이 참사는 당시에도 국제적 충격을 일으켰고, 전쟁 범죄 중에서도 특별히 잔혹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그 후 프랑스 정부는 폐허가 된 마을을 복구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오라두르는 프랑스 내 ‘기억의 장소(lieu de mémoire)’로, 물리적 유산을 통해 집단 기억을 계승하는 방식을 상징적.. 2025. 7. 3.
[해외탐방]스코틀랜드 슬레인즈 성 – 드라큘라 전설의 진짜 무대 드라큘라의 고향이 루마니아가 아닐 수도 있다?브램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루마니아의 브란 성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정작 이 전설적인 흡혈귀의 이미지에 더 깊은 영향을 준 장소가 스코틀랜드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바로 슬레인즈 성(Slains Castle). 스코틀랜드 동북부, 애버딘셔의 절벽 위에 자리한 이 고풍스러운 폐허는, 소설이 출간되기 6년 전인 1895년 브램 스토커가 실제로 머물렀던 장소이기도 하다.이 고성이 지닌 분위기는 단순한 폐허 이상의 것을 품고 있다. 가파른 바위 절벽에 매달려 있는 구조, 회색빛 석재 외벽, 폭풍우가 몰아칠 때마다 울리는 거친 바람 소리까지. 당시 스토커는 이곳에 머무르며 고성의 구조, 날씨, 고립된 분위기를 메모로 기.. 2025. 7. 2.
[해외탐방]이탈리아 크라코 유령 마을 – 무너진 언덕 위의 시간 언덕 위의 요새도시, 크라코의 시작이탈리아 남부 바실리카타 주의 해발 400m 산등성이에 자리한 고대 도시 **크라코(Craco)**는, 처음부터 고립된 폐허는 아니었다. 기원전 8세기 경부터 정착 흔적이 발견될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이 도시는, 중세 시대를 거치며 전략적 요충지로 성장했다. 주변 지형의 특성상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쉬워, 요새형 마을로 발전하였고 11세기에는 본격적인 석조 건축물과 성채 구조가 갖춰지기 시작했다.크라코는 지역의 행정 중심지로 기능하며, 농업과 목축업을 기반으로 번창했다. 특히 19세기에는 수천 명이 이곳에 거주했고, 수도, 성당, 학교, 병원 등 기본적인 기반 시설도 잘 갖춰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 전성기는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자연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힘이, 이.. 2025. 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