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시 폐허 탐방

[해외탐방]벨기에 더블록 벨벳 극장 – 붉은 커튼 뒤의 정적

산업도시의 심장에 자리했던 문화공간

벨기에 남부 왈롱(Wallonia) 지방의 오래된 산업도시, 리에주(Liège) 인근. 무채색의 철도와 공장이 늘어선 구역 한복판에 숨겨진 낯선 건축물이 하나 있다. 바로 ‘더블록 벨벳 극장(De Bloc Velvet Theatre)’, 한때 광산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문화적 쉼터였던 이 극장은 지금은 폐허 속 정적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 극장은 1930년대 초반, 광산 산업이 정점을 찍던 시기에 세워졌으며, 예술 영화 상영, 연극 공연, 음악회가 활발히 열리던 시민극장이었다. 좌석은 600석 규모였고, 붉은 벨벳 커튼과 황동 난간, 대리석 계단은 당시 노동자 계층에게는 드물었던 호사스러운 문화 경험을 선사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산업 구조조정과 탄광 폐쇄의 물결 속에서 이 극장도 점차 관객을 잃었다. 1985년경 완전히 폐쇄된 뒤, 소유권 문제와 복구 예산 부족으로 인해 30년 넘게 방치되며 자연의 일부로 되돌아가는 중이다.

 

 

 

붉은 커튼과 천장의 프레스코, 시간이 멈춘 극장

더블록 벨벳극장의 내부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시간이 멈춘 무대”**다. 주요 공간인 객석에는 붉은 벨벳 천이 희뿌연 먼지와 곰팡이에 덮인 채 일부 남아 있고, 나무 바닥은 군데군데 무너져 내려 다리가 빠질 만큼 위험한 구역도 있다.

천장에는 미세하게 퇴색된 프레스코 벽화가 남아 있고, 무대 위에는 조명이 꺼진 채 삐걱거리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한때 조명 담당자가 자리하던 갤러리석도 완전한 폐허로 변했지만, 구조 자체는 의외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극장의 공간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무대 뒤편에는 분장실과 작은 창고, 그리고 오래된 대본과 의상 파편들이 흩어져 있다. 이 모든 풍경은 예술의 흔적이라기보다는 공연이 영영 끝나버린 세트장, 혹은 유령이 지키는 문화의 성소를 연상케 한다. 침묵 속에서 가끔 들리는 물 떨어지는 소리와, 무대 커튼이 바람에 살짝 흔들릴 때 느껴지는 전율은 이 공간의 특별함을 더한다.

 

 

[해외탐방]벨기에 더블록 벨벳 극장 – 붉은 커튼 뒤의 정적

 

 

 

다크 투어리즘과 영상 미디어가 주목한 공간

더블록 벨벳극장은 공식적으로 개방된 관광지는 아니지만, 수년 전부터 유럽 폐허 탐방자들과 다큐멘터리, 뮤직비디오, 광고 촬영팀 사이에서 ‘핫플레이스’로 주목받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완벽하게 폐허가 된 극장 구조, 잔존한 벨벳 커튼, 붉은색 조명 자취가 뿜어내는 시각적 서사가 굉장히 강렬하기 때문이다.

이 극장은 ‘무너진 예술의 상징’으로 불리며, 다수의 유럽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이 이곳에서 앨범 커버를 촬영하거나, 모노톤 뮤직비디오의 배경으로 활용했다. 폐허의 미학이라는 개념이 점차 문화 콘텐츠에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으며, 이 극장의 존재감도 더욱 커졌다.

특히 영화계에서는 이 공간이 **‘현실 속 세트장’**으로서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품이나 배경을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그대로 촬영할 수 있는 생생한 폐허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따른 문제도 발생하는데, 무단 침입이나 촬영 후 방치로 인한 훼손 사례가 이어지며 지역 사회는 점차 문화 보존과 촬영 산업 사이의 균형을 고민하고 있다.

 

 

 

 문화 유산인가, 그냥 낡은 건물인가?

더블록 벨벳극장은 공식적으로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지 않다. 이는 벨기에 내에서도 ‘산업화 시대의 지역 예술 시설’을 보존 가치 있는 유산으로 인식하지 않는 경향이 반영된 결과다. 하지만 최근 들어 도시재생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폐허들이야말로 지역 정체성과 역사적 맥락을 가장 잘 담고 있다”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극장 주변 지역은 빠르게 재개발되고 있고, 이 극장은 ‘도시의 흉물’로 철거 대상이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폐허 탐방자들과 예술가들의 방문이 늘면서, “예술이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예술이 피어난다”는 상징적 사례로 재조명되고 있다.

극장의 잔해 위에 현대 예술가들의 퍼포먼스, 사진전, 소규모 연극이 간헐적으로 개최되기도 했으며, 이런 움직임은 극장이 단순 폐허에서 **‘비공식적 예술 플랫폼’**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만 여전히 불법 출입이나 시설 훼손 문제가 상존해, 향후 어떤 방향으로 보호·활용될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폐허와 콘텐츠 사이의 경계 지점

더블록 벨벳극장은 단지 유령의 무대가 아니라, 오늘날 폐허가 어떻게 소비되고 활용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폐허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과, 그저 콘텐츠의 ‘배경 이미지’로 소비하는 것 사이에는 미묘한 경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면, 폐허의 역사성과 진정성은 점차 지워질 수 있다.

특히 다크 투어리즘과 유튜브 기반 콘텐츠 산업이 확장되면서, 많은 폐허가 실제 존재했던 사람들의 삶과 기억이 아닌, 시각적 자극으로만 소모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극장 역시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이 공간을 ‘멋진 배경’으로만 보지 않고, 실제 이 무대에서 공연을 준비하던 예술가, 극장을 찾던 시민들, 그리고 도시의 문화적 역사를 함께 떠올려야 한다.

더블록 벨벳극장은 여전히 붉은 커튼을 거둔 적이 없다. 단지 관객이 사라졌고, 공연이 끝나지 않은 채 고요히 시간을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 발을 디딜 때, 그 고요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진정한 ‘감상’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