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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폐허 탐방

[해외탐방]폴란드 크르지나 정신병원 – 나치 유산의 음침한 자취

 

[해외탐방]폴란드 크르지나 정신병원 – 나치 유산의 음침한 자취

 숲속에 가려진 병원의 과거

폴란드 서부 루부쉬(Lubusz) 주의 깊은 숲속에 위치한 **크르지나 정신병원(Szpital Psychiatryczny w Krzyżanowie)**은 현재 지도에서도 쉽게 찾기 어려운 장소다. 19세기 말 독일령 시절에 지어진 이 병원은 원래 ‘요양을 위한 정원형 정신의료시설’로 설계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점령 하에서 어두운 역사의 중심지로 바뀌게 된다.

이 병원은 당시 ‘T4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나치의 장애인 학살 계획에 따라 수천 명의 정신질환자들이 강제로 수용되고, 실험과 방치, 조직적인 살해의 장소가 되었다. 이는 단순한 전쟁 피해가 아닌 체계적인 국가폭력의 일환이었다. 특히 정신병원 내부에서 이뤄진 무기력한 환자에 대한 의학 실험, 절전요법, 약물 투여 실험은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도 자료로 제출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소련과 폴란드 당국은 이 병원을 한동안 다시 정신의료시설로 재활용했으나, 1980년대 후반 이후 점차 시설이 노후화되고 관리가 어려워지면서 완전히 폐쇄되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병원은 시간과 자연에 의해 붕괴되어 가는 폐허로 남겨지게 되었다.

 

 

건물의 잔해, 그 위에 남은 의학의 흔적

현재 크르지나 정신병원을 찾는 탐방자들은 초입부터 쇠창살이 덮인 입구와 붕괴된 벽면, 깨진 유리창과 녹슨 철제 계단 등을 목격하게 된다. 외형은 중세 수도원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돌로 된 건물 구조와 높은 천장은 여전히 고딕 건축의 위엄을 품고 있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서면 극단적인 침묵과 폐허의 무게감이 즉시 탐방자의 감각을 짓누른다.

병실로 쓰였던 공간엔 낡은 침대 프레임과 휠체어, 약품 유리병, 간호기록지 등이 방치되어 있으며, 지하실은 의약품 저장고 혹은 시신 임시 보관소로 쓰였다는 증언이 있다. 벽면에는 독일어로 쓰인 일부 문구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낙서처럼 보이지만 그중 일부는 환자 치료 지침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병원 뒤편으로 이어지는 건물 구역에는 병동 간 수송용 철제 트롤리와 파괴된 수술실 조명 기구가 뒤엉켜 있는데, 이를 통해 이 공간이 단순 요양소를 넘어 외과적 처치가 일어나던 장소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 모든 흔적은 단순히 구조물로서가 아니라, 역사의 증언으로 기능하고 있다.

 

 

다크 투어리즘의 명소가 된 이유

크르지나 병원은 지금까지도 폴란드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쉽게 언급되지 않는 장소다. 하지만 폐허 탐방자(Urbexer)나 다크 투어리즘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나치 유산의 실체를 가장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폐허’**로 손꼽히며, 일부 유럽 탐방 블로그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은밀하게 공유되고 있다.

현장을 찾은 이들은 대부분 병원의 구조보다는 그 안에 흐르는 공기, 분위기, 그리고 보이지 않는 잔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디선가 지켜보는 느낌이 든다”, “벽에 새겨진 흔적이 자꾸 눈에 밟힌다”는 식의 증언이 이어지고, 일부는 이곳에서 강한 어지러움이나 불안감을 느꼈다는 사례도 있다.

도시전설도 있다. 병원이 한때 비공식적인 정신질환자 감금소로 운영되었고, 실종된 환자들이 암매장되었다는 괴담은 여전히 지역에서 회자된다. 그러나 폴란드 정부나 지자체는 이곳에 대해 공식적으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며, 단순 폐허로 분류되어 관리되고 있지 않다. 이는 이 유산이 아직도 과거에 대한 상처로 남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역사의 그림자와 사회의 외면

크르지나 정신병원은 단순히 ‘버려진 건물’이 아니라, 20세기 유럽이 정신질환자와 장애인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고발하는 장소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무지와 공포, 그리고 정치적 악용이 만연했고, 이는 수많은 병원이 감금소 또는 인권 유린의 현장으로 전락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폴란드는 이 병원에 대해 아직 공식 기념사업이나 문화재 등록을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전후 냉전과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과거사를 정리하지 못한 역사적 공백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폴란드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장소를 단순 폐허가 아닌, 기억과 성찰의 장소로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조용히 일고 있다.

건축 보존가나 역사 연구자들이 이 병원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예산과 지역 사회의 무관심 속에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크르지나 병원은 ‘잊힌 장소’이자 ‘잊히길 강요받은 장소’로 이중의 침묵 속에 갇혀 있는 셈이다.

 

 

폐허 탐방자의 태도 – 증인의 책임

이런 장소를 탐방하는 행위는 단순 호기심이나 사진 촬영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특히 크르지나 정신병원 같은 장소는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어떤 생명이 희생되었는지를 기억하고, 우리 사회가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상기시키는 책임을 동반한다. 폐허는 침묵하지만, 그 침묵을 해석하는 것은 방문자의 몫이다.

정신병원 폐허를 공포 콘텐츠로 소비하거나, 그 안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고통을 무시한 채 ‘스릴’을 즐기는 방식은 점차 비판받고 있다. 특히 크르지나 병원처럼 국가폭력의 현장이었던 곳에서는 정중함과 절제, 역사적 존중의 태도가 필요하다.

유럽 곳곳의 폐정신병원은 단순한 폐허가 아닌 ‘윤리적 공간’으로 간주되며, 이러한 접근은 앞으로 폐허 탐방 문화의 방향성에도 깊은 영향을 줄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마주하며 배우고, 잊지 않음으로써 무거운 기억을 미래로 전하는 증인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