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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폐허 탐방

[해외탐방]스코틀랜드 슬레인즈 성 – 드라큘라 전설의 진짜 무대

[해외탐방]스코틀랜드 슬레인즈 성 – 드라큘라 전설의 진짜 무대

드라큘라의 고향이 루마니아가 아닐 수도 있다?

브램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루마니아의 브란 성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정작 이 전설적인 흡혈귀의 이미지에 더 깊은 영향을 준 장소가 스코틀랜드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바로 슬레인즈 성(Slains Castle). 스코틀랜드 동북부, 애버딘셔의 절벽 위에 자리한 이 고풍스러운 폐허는, 소설이 출간되기 6년 전인 1895년 브램 스토커가 실제로 머물렀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 고성이 지닌 분위기는 단순한 폐허 이상의 것을 품고 있다. 가파른 바위 절벽에 매달려 있는 구조, 회색빛 석재 외벽, 폭풍우가 몰아칠 때마다 울리는 거친 바람 소리까지. 당시 스토커는 이곳에 머무르며 고성의 구조, 날씨, 고립된 분위기를 메모로 기록했으며, 훗날 『드라큘라』 속 흡혈귀의 고성이 위치한 절벽 장면 대부분이 슬레인즈 성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슬레인즈 성은 실제 역사적으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16세기 말 건립되어 스코틀랜드 제9대 얼(Earl) 가문이 거주하던 이 성은, 18세기 이후 여러 차례 개조되었으나, 20세기 초 유지 비용 부담으로 인해 결국 철거되어 현재의 폐허 상태로 남겨졌다.

 

 

 

자연과 시간에 잠식된 고딕 폐허의 풍경

오늘날 슬레인즈 성을 방문하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절벽에 걸쳐진 이 폐허는 완전히 붕괴되지 않은 덕에 외관은 어느 정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고딕 양식의 창문과 탑의 일부가 여전히 위용을 드러낸다. 하지만 성 내부는 대부분 지붕이 무너지고, 벽체가 허물어진 채 자연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특히 거친 북해 바람과 안개, 해풍에 마모된 석재 구조물은 이 장소의 극적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성벽에는 이끼와 풀이 자라나 있고, 때로는 야생 동물들이 유유히 거닐며 ‘유령 성’의 느낌을 한층 배가시킨다. 내부에 남아 있는 흔적은 거의 없지만, 바닥의 타일 조각이나 철제 난간 일부는 여전히 당시의 고급스러움을 암시한다.

무엇보다 특별한 점은, 이 장소가 상업적으로 개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차장도, 매표소도 없다. 그저 바다를 따라 이어진 트레일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폐허와 마주하게 되는 구조다. 이런 점에서 슬레인즈 성은 전통적인 ‘관광지’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탐방지이자 시간의 격류 속에 잠긴 건축 유산이다.

 

 

 

현지 문화와 지역 주민들의 상반된 시선

슬레인즈 성에 대한 지역 사회의 시선은 복합적이다. 한편에서는 이 장소를 보존하여 관광 명소로 발전시키려는 의견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지금의 자연 상태 그대로 두자는 입장도 존재한다. 실제로 몇 차례 외부 기업이 성을 리노베이션하여 호텔이나 문화시설로 활용하려 했지만, 지자체와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모두 무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슬레인즈 성은 스코틀랜드인들의 ‘기억 속의 성’으로 남아 있다. 지역 청소년들이 가끔 이곳을 모험 장소로 삼기도 하고, 문학 팬들과 탐방자들이 조용히 찾는 순례지처럼 여겨진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드론 촬영과 SNS를 통해 전 세계에 이 장소가 알려지면서, 외국인 방문자가 늘고 있다. 이로 인해 일부는 안전 관리나 탐방 경로에 대한 정비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으나, 여전히 이곳은 입장료도, 안내도 없는 ‘자유로운 폐허’로 남아 있다.

 

 

 

고딕 로망과 다크 투어리즘 사이

슬레인즈 성은 ‘드라큘라의 영감지’라는 문학적 상징성과, 자연 속 폐허라는 시각적 매력을 동시에 지닌 독특한 장소다. 그 자체로는 상업화되지 않았지만,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대부분 ‘고딕 로망’이라는 감각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시간에 의해 침식되고, 바람과 구름이 지배하는 공간. 마치 한 편의 소설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는 다크 투어리즘이라는 차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폐허 탐방이 단순한 유행이 아닌, 과거와 시간, 문화에 대한 몰입적 접근이라면, 슬레인즈 성은 그 이상적인 사례다.

이곳은 우리가 과거를 ‘보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더 진실한 기억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절벽 위 폐허의 바람 속에서 끊임없이 되새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