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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폐허 탐방

[해외탐방]프랑스 오라두르 쉬르 글란 – 전쟁의 폐허가 된 마을

[해외탐방]프랑스 오라두르 쉬르 글란 – 전쟁의 폐허가 된 마을

침묵 위에 남겨진 마을, 오라두르 쉬르 글란

프랑스 중서부 리무쟁(Limousin) 지방의 한적한 들판에 자리한 작은 마을, 오라두르 쉬르 글란(Oradour-sur-Glane). 이곳은 단순한 폐허가 아니다. 오늘날까지도 전쟁의 상처를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는, ‘기억을 위한 장소’다.

1944년 6월 10일,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 나치 친위대(SS)는 이 마을에 진입해 민간인 642명을 학살했다. 이 참사는 당시에도 국제적 충격을 일으켰고, 전쟁 범죄 중에서도 특별히 잔혹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그 후 프랑스 정부는 폐허가 된 마을을 복구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오라두르는 프랑스 내 ‘기억의 장소(lieu de mémoire)’로, 물리적 유산을 통해 집단 기억을 계승하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남겨진 자전거, 구둣가게, 그리고 차가운 철문

현재 오라두르 마을을 걷다 보면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듯한 광경이 펼쳐진다. 무너진 건물 벽 사이로 녹슨 철제 자전거, 불에 탄 교회당 벽, 유리창이 깨진 채 방치된 구둣가게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바닥에는 당시 불에 탄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길목마다 안내 표지판 없이도 과거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이 마을의 가장 강력한 감정은 '침묵'이다. 현장을 방문한 이들은 입을 다물고 천천히 걷는다. 아무도 설명하지 않지만, 이곳에 흐르는 무거운 공기와 침묵이 스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생존자의 집기, 탄 흔적이 남은 유모차, 가정집의 부엌 기구들은 더 이상의 해설 없이도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또한 마을 중앙의 교회는 특히 비극적 상징성을 지닌다. 이곳에서 여성과 어린이 400여 명이 집단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교회 입구의 철문과 일부 파편이 유리 진열장 안에 보존돼 있으며, 당시 사건을 설명하는 소박한 패널이 하나 붙어 있을 뿐이다.

 

 

 '복원하지 않음'이라는 기억의 방식

프랑스는 오라두르 쉬르 글란을 일체의 복원 없이 ‘있는 그대로’ 보존함으로써, 역사적 기억을 물리적 공간에 고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흔히 보이는 박제된 박물관이나 전시실과는 다른 형태다. 이곳에서는 파괴된 잔해 자체가 설명자이며, 아무 말 없이도 그날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1953년, 프랑스 정부는 인근에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고 원주민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구 마을은 ‘국가 기념지’로 선언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전쟁의 비극을 상기시키는 장소로 남아 있다. 이러한 접근은 전 세계 역사기념물 관리에 있어 중요한 선례가 되었으며, 이후 유럽 각국이 자국의 참사 유적을 보존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

오라두르의 사례는 ‘보존’이라는 것이 단지 복원을 의미하지 않음을, 때로는 파괴된 그대로의 상태가 더 큰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애도의 공간을 넘어, 전쟁이 남긴 파괴의 본질과 인간의 잔혹성을 되새기는 공간이다.

 

 

다크 투어리즘의 의미와 경계

오라두르 쉬르 글란은 오늘날 전 세계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명소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탐방은 단순한 ‘호기심 충족’이 아닌, 윤리적 성찰과 역사적 책임을 동반해야 한다. 실제로 프랑스 정부와 지역 사회는 방문자들에게 경건한 태도와 사려 깊은 관람을 요청하고 있으며, 상업적 촬영이나 비하적 콘텐츠 제작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현장에는 특별한 안내 방송도 없고, 대부분의 구역이 자연 그대로 남겨져 있다. 이로 인해 많은 방문객들이 깊은 침묵 속에서 탐방을 마치며, **"말이 필요 없는 교육의 현장"**이라는 평가를 남긴다. 이는 단순히 건물이나 유물의 관람이 아니라, 공간 자체와 감정의 교류를 추구하는 다크 투어리즘의 본질적인 특성과도 맞닿아 있다.

오라두르는 탐방자에게 묻는다. “당신이 지금 이곳을 걸으며 무엇을 느끼는가?” 그 질문은 감동을 줄 수도, 죄책감을 유발할 수도 있으며, 결국 이 장소가 여전히 살아 있는 이유가 된다.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교훈

오라두르 쉬르 글란을 찾을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이곳이 관광지가 아닌 국가적 추모지이자 살아 있는 역사 교재라는 점이다. 입장료는 없지만, 성숙한 태도와 침묵이 이곳의 필수 입장권이다. 불필요한 사진 촬영, 낙서, 드론 사용은 모두 금지되며, 그 어떤 말보다 이 마을에 경의를 표하는 침묵이 중요시된다.

이 마을은 전쟁과 학살, 침묵과 기억의 중첩이 만들어낸 고유의 공간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폐허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인간성 회복의 가치를 동시에 체험하게 된다. 오라두르 쉬르 글란은 과거에 대한 슬픈 회상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 윤리적 폐허의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