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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폐허 탐방

[해외탐방]이탈리아 크라코 유령 마을 – 무너진 언덕 위의 시간

[해외탐방]이탈리아 크라코 유령 마을 – 무너진 언덕 위의 시간

언덕 위의 요새도시, 크라코의 시작

이탈리아 남부 바실리카타 주의 해발 400m 산등성이에 자리한 고대 도시 **크라코(Craco)**는, 처음부터 고립된 폐허는 아니었다. 기원전 8세기 경부터 정착 흔적이 발견될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이 도시는, 중세 시대를 거치며 전략적 요충지로 성장했다. 주변 지형의 특성상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쉬워, 요새형 마을로 발전하였고 11세기에는 본격적인 석조 건축물과 성채 구조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크라코는 지역의 행정 중심지로 기능하며, 농업과 목축업을 기반으로 번창했다. 특히 19세기에는 수천 명이 이곳에 거주했고, 수도, 성당, 학교, 병원 등 기본적인 기반 시설도 잘 갖춰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 전성기는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자연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힘이, 이 언덕 마을의 운명을 서서히 뒤바꾸기 시작했다.

 

 

 대지진과 산사태 – 사람들이 떠나기까지

크라코가 유령 도시로 전락한 결정적인 원인은 자연재해다. 1963년, 잇따른 산사태와 지반 붕괴가 마을 전체를 뒤흔들면서 많은 주택이 기울거나 무너졌다. 주민들의 안전을 우려한 정부는 점차 마을을 폐쇄하기 시작했고, 1972년 대규모 이주 정책을 통해 대부분의 주민들은 인근 평지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후 1980년 대지진까지 겹치면서 마을은 완전히 폐허로 남게 되었다.

현재 크라코의 건물들은 대부분 원형 그대로 보존된 상태다. 돌로 지어진 고딕 양식의 건물, 종탑이 있는 성당,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여전히 과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붕괴된 벽면과 무너진 지붕, 움푹 꺼진 바닥을 보면, 이곳이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장소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러한 풍경은 도시 탐험가(Urbexer)와 예술가, 영화감독들에게는 독특한 촬영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크라코는 <007: 퀀텀 오브 솔러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등 여러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했으며, 이탈리아의 ‘죽은 도시들(Città Morte)’ 중 하나로 불리며 다크 투어리즘 명소가 되었다.

 

 

 침묵의 골목에서 마주하는 시간의 잔상

크라코를 찾는 이들이 가장 인상 깊게 꼽는 요소는 ‘고요함’이다. 사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이곳에서는 바람이 건물 틈을 스쳐지나가는 소리조차 크게 들린다. 그만큼 도시 전체가 시간의 흐름에서 단절된 듯한 느낌을 준다.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감각은 이 도시의 구조적 배치 덕분이기도 하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성채가 마치 성문처럼 도시를 지키고 있고, 골목길은 미로처럼 엉켜 있다. 학교의 칠판에는 아직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고, 가정집에는 식탁과 의자가 그대로 놓여 있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흔적이 빠져나간 도시가, 그 자리를 어떻게 기억의 조각으로 채우는지를 보여준다.

방문자는 그 고요함 속에서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도시의 침묵과 마주하게 된다. 관광지의 소음도, 가이드의 설명도 없이, 그저 그곳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삶이 배경처럼 펼쳐진다. 바로 이런 이유로 크라코는 ‘가장 아름다운 유령 도시’로 불린다.

 

 

 크라코 재생 프로젝트 – 폐허와 보존 사이

이탈리아 정부와 지역 단체는 크라코의 역사적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유산으로 남기기 위한 다양한 재생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건축학자와 보존 전문가들이 구조물의 붕괴를 막기 위한 보강 작업을 시도하고 있으며, 일부 건물은 외부 관람용으로만 개방되고 있다. 2010년에는 크라코 재단(Fondazione Craco)이 설립되어, 지역 문화 콘텐츠와 예술 활동의 중심지로 재활용하는 방향도 검토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재생이 ‘관광 산업’으로만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크라코는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지역 사회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거점으로 인식되며, 도시 계획과 기억 보존 사이의 균형을 모색하는 실험장이기도 하다.

특히 유럽 내에서 점점 주목받는 ‘문화적 폐허의 활용’이라는 트렌드 속에서, 크라코는 과거를 보존하면서도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상징적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도시는 더 이상 단순히 ‘버려진 마을’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도시 재해석의 사례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고요한 마을에 남겨진 의미 – 유령 도시를 대하는 자세

크라코를 방문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고요함을 존중하는 태도다. 이곳은 단순한 폐허가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삶이 누적된 흔적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기억 체계다. 무단 진입이나 낙서, 구조물 훼손은 지역 사회에도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도시가 지닌 의미를 훼손하게 된다.

현재 크라코는 가이드 투어 또는 공식 허가를 통해 제한적으로만 탐방이 가능하다. 탐사에 앞서 반드시 운영 단체의 안내를 받고, 입장 가능한 구역과 위험 지역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비탈진 지형과 무너진 건물들 사이를 걷는 탐방은 육체적 위험도 크기 때문에, 단단한 신발과 보호 장비를 갖추는 것이 필수다.

크라코는 과거가 머문 도시이자, 우리에게 시간의 무게와 의미를 되묻는 공간이다. 언덕 위 폐허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남긴 흔적이고, 그 흔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