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자락의 묘한 고요, 잊힌 요양원의 존재
제주시 외곽, 한라산 중턱의 숲길을 따라가면 일반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조용한 구역에 들어선다. 그 깊은 산속,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회색빛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1990년대까지 운영되었던 ○○요양원으로, 장기 입원자와 고령 환자들을 주로 수용하던 병원이었다. 현재는 폐쇄된 지 20년이 넘은 폐허지만, 건물의 형태는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고, 유일하게 감춰진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병원형 폐건물이다.
요양원이 자리한 지형은 바람이 잦고 조용하며, 병원 주변에는 검은 현무암 돌담이 원형 그대로 둘러쳐져 있어 마치 하나의 요새처럼 느껴진다. 병원의 존재를 알리는 표지판은 오래전에 철거되었고, 지도상에서도 ‘시설’로 표시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장을 찾으면 확실히 느껴진다. 이곳은 한때 수십 명의 삶이 이어졌던 공간이었고, 동시에 말없이 잊힌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장소다.
내부의 침묵, 복도 위에 쌓인 세월
건물 내부에 들어서면, 오랜 세월 닫힌 공간이 주는 묘한 무게감이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한때 병실이었을 공간은 단조로운 구조로 길게 이어져 있고, 각 방마다 침대 프레임과 작은 캐비닛이 방치되어 있다. 어떤 방에는 아직도 이불 모양이 희미하게 남은 먼지 자국이 있고, 벽면에는 투약 기록지, 간호사 교대 근무표, 입소 환자 이름표까지 붙어 있었다. 그중 일부는 손글씨로 적혀 있어, 인공적인 폐허가 아닌 ‘실제로 사용되던 공간’이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공용 공간으로 이어지는 복도는 휘어진 형광등과 깨진 유리창으로 가득하다. 바닥에는 습기 때문에 미끄러진 타일이 들떠 있고, 간호사 스테이션의 흰 플라스틱 책상 위에는 약병 라벨들이 흩어져 있다. 놀라운 건, 이곳이 ‘급히 폐쇄된 느낌’이라는 점이다. 마치 어떤 이유로 갑자기 환자와 의료진이 모두 자리를 비우고,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정적이 퍼져 있다.
특이하게도 식당으로 보이는 공간은 지금도 그 배치가 남아 있다. 가스레인지, 오래된 냉장고, 그리고 금속 식판 보관대. 철제 의자가 뒤엉켜 있는 이 공간에서 들려오는 것은 바람 소리뿐이다. 문득 창문 틈으로 들어온 햇빛이 부서진 테이블 위를 스쳐 갈 때, 이곳이 과거에 얼마나 ‘일상적인 공간’이었는지를 떠올리게 된다.
제주 의료 인프라의 역사적 사각지대
제주의 폐요양원을 살펴보는 일은 단순히 폐허 탐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공간은 20세기 말, 제주도의 의료 인프라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실증적 사례다. 당시 제주도는 도서지역 특성상 고령 환자나 만성 질환자를 위한 장기요양 시설이 부족했고, ○○요양원은 그 부족한 수요를 메우기 위한 시도 중 하나였다. 그러나 교통 접근성의 불편, 시설의 노후화, 지원 인력 부족 등으로 운영은 점점 어려워졌고, 결국 예고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
당시의 운영 실태를 보여주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건물에 남은 흔적만으로도 많은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예컨대 각 병실마다 설치된 난방구조는 중앙 제어식이 아니라 개별 등유난로였으며, 간호실에 남아 있는 출퇴근기록부에는 겨우 3~4명의 직원 이름만 반복된다. 이는 당시 의료 취약 지역에서 일어났던 전형적인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다.
더불어 폐쇄 이후 지역 사회에서도 이 병원은 금기처럼 회자되었다. 일부는 ‘밤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며 괴담으로 소비했고, 또 일부는 실제로 이곳에서 일했던 의료진의 힘든 기억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 폐요양원은 단순한 폐허가 아니라, 제주의 의료 공백기 속 인간의 삶과 고통이 응축된 장소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현장을 마주할 때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
이 요양원은 현재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으며, 일부 출입구는 자연 붕괴로 개방된 상태지만 공식적으로는 출입이 금지된 사유지다. 따라서 직접적인 출입은 법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이 장소를 기록하고 논의하는 것 자체는 공익적 목적이 될 수 있으며, 우리 사회가 기억해야 할 ‘소외된 역사’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된다.
탐방 콘텐츠를 제작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은, 이곳을 자극적이거나 호러 분위기로 소비하지 않는 것이다. 병원이자 요양원이었던 공간에는 수많은 개인의 아픔과 삶이 축적돼 있었고,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다. 단지 폐허의 비주얼을 따라가거나 괴담 콘텐츠로 변질시키기보다는, 이 공간이 사회적 구조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조명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 폐요양원은 제주라는 관광 중심지 안에서도 외면당한 또 하나의 현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환호하는 풍경 너머에는 종종 잊힌 공간이 있고, 그 잊힘 속에는 기록되지 못한 역사와 사람들의 흔적이 존재한다. 그것이 폐허 탐방이 단순한 ‘탐험’이 아니라, 공간과 기억을 되살리는 일로 이어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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