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풍 건물 사이, 100년 전 시간의 틈을 걷다
전라북도 군산의 구도심에 들어서면 낯선 이국적 정취가 뿜어져 나온다. 붉은 벽돌의 2층 건물, 목재 창틀, 양옥 구조의 상가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는 이 거리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지은 건물들이라는 점이다.
이곳은 과거 군산항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본인 상권의 핵심지였으며, 일제의 경제 침탈 거점 중 하나였다. 지금도 군산세관, 동국사, 히로쓰 가옥, 초원사진관 등의 건축물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마치 시간의 틈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준다.
하지만 이 거리의 독특한 분위기 뒤에는 무거운 역사가 숨어 있다. 겉보기에 고풍스럽고 이국적인 풍경이지만, 실상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상처를 품고 있는 현장이다. 이곳은 단지 오래된 거리가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식민의 흔적이 뒤엉킨 공간이다.
2. 식민의 흔적과 건축, 역사의 층위를 보다
군산 구 일본인 거리를 걷다 보면, 단순히 오래된 건축양식 이상의 것을 느낄 수 있다. 일본풍 저택과 상점, 우체국과 창고는 당시 일본 상인과 관료들이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던 시절의 사회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다. 거대한 부의 흐름은 조선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고, 건물 하나하나가 식민지 경제 체제의 상징이었다.
대표적인 건물이 바로 히로쓰 가옥이다. 군산 지역의 일본 거류민 대표였던 히로쓰가 살던 이 저택은, 당시 목재 무역으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지어진 공간이다. 전통 일본식 정원과 기와, 안채와 별채의 배치는 당시 일본 중산층 이상의 주거 문화를 보여준다. 이 사적인 공간 속에서 벌어진 일들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 안에 흐르는 시간은 여전히 건축물 속에 남아 있다.
지금은 카페나 전시관으로 바뀐 건물들도 많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어디에도 조선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이 거리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존재한다. 조선인들은 이 길의 뒷편, 시장 너머 움막 같은 집들에 머물렀다. 거리는 여전히 과거의 위계 구조를 품고 있다.
3. 관광지와 역사 교육의 경계
최근 군산시는 구 일본인 거리를 활용한 도보 여행 프로그램과 근대문화유산 관광 코스를 운영하며, 이 지역을 관광지로 육성하고 있다. 다양한 예술 전시, 독립출판물 서점, 카페 등이 들어서면서 청년 창업자들의 유입도 눈에 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변화가 지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이들이 묻는다. 이 거리는 과연 단순히 ‘멋진 관광지’로 소비되어도 괜찮은가?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고, 일본풍 인테리어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이 공간에 깃든 식민의 역사적 맥락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가?
군산의 거리는 우리 근현대사 속에서 가장 치열했던 저항과 상처의 공간이기도 하다. 단지 ‘예쁜 거리’로 소비되기보다는, 그 장소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안내와 교육, 콘텐츠가 필요하다. 건물 하나하나에 담긴 역사적 층위를 풀어내는 작업 없이는, 이 거리는 ‘예쁜 폐허’일 뿐이다.
4. 기억을 걷는 여행자의 자세
군산 구 일본인 거리를 걷는다는 건, 단순한 관광이나 건축 감상이 아니다. 그것은 곧 역사를 걷는 일이며, 기억을 되새기는 행위다. 이 거리에서 마주하는 돌계단 하나, 낡은 간판 하나, 기와의 형태 하나에도 특정한 시대의 분위기와 서사가 담겨 있다.
콘텐츠 제작자나 탐방자는 이 공간을 단순히 배경으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오늘날 이 거리에서 영업 중인 상점 대부분은 그 흔적을 지우고 있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곳곳에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잊혀가는 문서가 존재한다.
지금도 군산에는 그 시절을 기억하는 노인들이 살고 있으며, 몇몇 건물은 보존이 아닌 철거의 위기에 놓여 있다. 그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질문해야 한다. 이 거리는 누구의 것이었으며, 우리는 이 기억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기억은 단지 보존이 아닌 해석의 문제다. 군산 구 일본인 거리 탐방이 가치 있으려면, 그저 ‘옛것’에 머무르지 않고, ‘무엇을 기억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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